호소카와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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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소카와 내각은 1993년 7월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수 확보에 실패한 후, 신생당, 일본신당, 사회당 등 8개 정당의 연립으로 출범했다.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하여 정치 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으며, 소선거구제 도입 등을 골자로 하는 정치 개혁 4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국민복지세 구상 실패, 연립 여당 내부의 갈등, 사가와큐빈 그룹으로부터의 차입금 문제 등으로 인해 1994년 4월 총리가 사임하고 내각이 총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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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 내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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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내각 이름 | 호소카와 내각 |
일본어 표기 | 細川内閣 |
내각 번호 | 79대 |
총리 | 호소카와 모리히로 |
전직 | 중의원 의원, 전 구마모토현 지사, 일본 신당 대표 |
성립일 | 1993년 8월 9일 |
종료일 | 1994년 4월 28일 |
정부 수반 직책 | 총리 |
정부 수반 | 호소카와 모리히로 |
부총리 직책 | 부총리 |
부총리 | 하타 쓰토무 |
이전 내각 | 미야자와 내각 (개조) |
다음 내각 | 하타 내각 |
사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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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
정치 체제 | 다수 연립 정부 (하원) |
여당 | 일본 신당 일본 사회당 신생당 공명당 민주사회당 신당 사키가케 사회민주연합 민주개혁연합 |
야당 | 자유민주당 일본 공산당 |
야당 대표 | 고노 요헤이 (자민당) |
선거 | 제40회 총선거 (1993년) |
의회 구성 | 262 / 511석 |
관련 링크 | |
관저 공식 명단 | 관저 공식 명단 |
2. 내각 성립 배경
1993년 일본 총선 이후 구성된 호소카와 내각은 좌파(사회당, 사민연합, 민사당)과 우파(신생당, 신당사키가케, 자유개혁당), 그리고 종교 정당(공명당)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연립정부였다.[1] 자민당은 이미 1993년 총선 이전에 탈당 사태로 인해 과반수를 상실한 상태였다.[1] 이에 공산당을 제외한 모든 야당이 연합하여 38년 만에 최초로 비자민당 정부를 수립하고 선거 제도 개혁을 목표로 하였다.[1]
오자와 이치로와 그의 자유개혁당 동료들은 정부 구성 협상을 주도했고, 구마모토현 전 지사이자 소규모 정당인 신당사키가케의 당수인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추대했다.[1] 호소카와는 1993년 8월 6일 국회에서 총리로 선출되어, 40년 만에 최초의 비자민당 총리가 되었다.[1]
2. 1. 1993년 총선거 결과
1993년 7월 18일에 실시된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선거 이전보다 한 석을 더 얻었지만, 미야자와 내각 해산과 관련된 당내 분열의 영향으로 단독 과반수 확보에는 실패했다. 거짓말쟁이 해산 국면에서 자민당을 탈당한 하타파가 결성한 신생당, 같은 시기 자민당을 탈당한 다케무라 마사요시 등이 결성한 신당 사키가케, 전 구마모토현 지사인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전년도에 결성한 일본신당 등 3개의 신당이 합쳐 총 100석 이상을 획득했다. 반면, '신당 붐'의 영향을 받은 일본사회당은 70석으로, 지난 총선에서 '도이 붐'으로 얻었던 의석을 크게 잃었다.신생당은 사회당·공명당·민사당·사회민주연합·민주개혁연합 등과 연립 정권 수립에 합의했고, 일본신당과 신당 사키가케는 별도의 통일회파를 결성해 자민·비자민 세력 양측과 정치 개혁 실현을 조건으로 연립 협상에 들어갔다. 양측 모두 조건을 수용했지만,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 지명'을 제시한 비자민 연립 세력이 결국 연립에 성공하여,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하는 새로운 정권이 발족되었다.[30]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파란을 부르는 충격적인 투표 결과가 되었다. 정권 여당인 자민당의 획득 의석 수는 선거 전 세력을 거의 유지했지만, 선거 전 당 분열의 영향으로 단독 과반수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한편, 자민당을 탈당한 하타파가 결성한 신생당, 무라야마 마사요시 등의 그룹이 결성한 신당 사키가케, 전 쿠마모토현 지사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전년에 결성한 일본신당 3개 신당은 총 100석 이상을 획득하여 의석 수에서 크게 약진했다. 또한, 야당 제1당인 일본사회당은 신당 붐의 영향을 받아 획득 의석 수가 70석이 되었는데, 이는 전회의 도이 붐으로 얻은 의석 수를 반감시킨 결과가 되었다.
신생당이 신속하게 사회당·공명당·민사당·사회민주연합·민주개혁연합의 각 당파와 연립정권을 수립하는 데 합의하는 한편, 일본신당과 사키가케는 통일 교파를 결성하고, 자민당·비자민당 양쪽과 정치 개혁의 실현을 조건으로 연립 협상에 들어갔다. 이것은 자민당이 과반수를 밑돌았기 때문에,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이끄는 일본신당과 무라야마 마사요시가 이끄는 신당 사키가케가 신정권 수립의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신당과 신당 사키가케가 "자민당 정권" 혹은 "비자민당 정권" 어느 쪽에 설 것인지 주목되는 가운데, 신당 사키가케의 타나카 히데유키에 따르면 "사상 신조가 다른 정당의 연립 정권은 임시·긴급 상황에만 통용되지, 경제 대책 등 현안을 늦추고 있는 정치 개혁을 조기에 처리하는 '특명 정권'으로서, 원내 교파 '사키가케 일본신당'이 '정치 개혁 정권의 제창에 의한 “이 손가락 잡아봐”'라는 제3의 선택지를 내놓는다"는 방침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16][17] 이 제창에 대해 에다 삿스키는 "좋았다, 이제 야합이라고 불리지 않아도 된다."라고 감상을 말했다고 한다.[18] 양쪽 모두 조건의 수용을 표명했지만, "호소카와 총리"를 제시한 비자민당 측이 결국 포섭에 성공하고,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수반으로 하는 신정권 "'''호소카와 내각'''"의 발족이 결정되었다.
2. 2. 연립 정권 구성 과정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은 단독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 신생당은 일본사회당, 공명당, 민사당, 사회민주연합, 민주개혁연합 등과 연립 정권 수립에 합의했다. 한편, 일본신당과 신당 사키가케는 통일 회파를 결성, 자민당과 비자민 세력 양측과 정치 개혁을 조건으로 연립 협상을 진행했다.신당 사키가케의 다나카 슈세이에 따르면, "사상과 신조가 다른 정당의 연립 정권은 임시적이며 정치 개혁을 위한 특명 정권"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고 한다.[16][17] 결국, 비자민 세력이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 지명'을 제시하며 연립에 성공했다. 이는 일본신당 대표이자 전 구마모토현 지사인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높은 국민적 인기를 활용한 신생당 대표 간사 오자와 이치로의 전략이었다.[30]
아사히 신문의 9월 초 여론 조사에서 호소카와 내각의 지지율은 71%에 달했다.
3. 내각의 주요 정책 및 활동
호소카와 내각은 출범 당시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행정 개혁, 규제 개혁, 지방 분권, 경기 대책 등 여러 현안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자세를 보였다.
특히 세제 개혁에 대한 의욕을 보였는데, 미국과의 경제 문제 협의 과정에서 미국의 내수 시장 확대 요구에 따라 소득세 감세를 추진하게 되었다. 1993년 11월 미·일 정상회담에서 호소카와 총리는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다음 해 소득세 감세 시행을 약속했다.
그러나 소득세 감세로 인한 세수 감소를 메우기 위한 재원 확보 방안이 문제였다. 호소카와 정권은 적자국채 발행을 억제하는 대신 소비세 증세를 통해 세수를 확보하려 했으나, 연립 여당 내 일본사회당의 반대로 난관에 부딪혔다.
1994년 2월 2일, 호소카와 총리는 소비세를 폐지하고 7%의 국민복지세를 도입하는 구상을 발표했지만, 내각 내 충분한 논의 없이 발표되어 연립 여당 내부의 반발을 초래했다. 결국 국민복지세 구상은 철회되었고, 미·일 정상회담도 결렬되었다. 결국, 호소카와 내각은 공약과 달리 3조 엔 남짓한 적자국채 발행을 포함한 1994년도 예산안을 편성해야 했다.[21]
이 외에도 1993년 12월,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결과에 따라 쌀 수입 부분 개방을 결정했다.[19]
3. 1. 정치 개혁
당시 일본 국민들은 55년 체제 하에서 고착화된 정경유착, 정치 자금 문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 선거 제도, 그리고 심각한 정치 부패 등에 대한 불만이 높았다. 자유민주당 역시 수년간 정치 자금 유용 없이도 정권 교체를 가능하게 하는 선거 제도 개혁이나 정치 자금 규제 강화 등, 이른바 정치개혁에 대해 논의해왔다. 그러나 자민당은 기존 체제 유지를 원하는 보수파와 이후 신생당, 신당 사키가케 등으로 분열되는 개혁파로 나뉘어 격렬하게 대립했고, 결국 정치 개혁을 실현하지 못한 미야자와 내각은 내각 불신임 결의를 받고 붕괴되었다.[12]이념이나 정책이 서로 다른 연립 여당들은 여론의 가장 큰 관심사이자 기존의 자민당 정권이 이루지 못했던 정치 개혁 실현을 목표로 연립 정권을 발족시켰다. 따라서 호소카와 내각은 이를 정치적 사명으로 내걸고 연내에 정치 개혁 법안을 성립시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호소카와 총리는 정치 개혁이 연내에 실현되지 않으면 정치적 책임을 지겠다고 공언하며 취임했다.
선거 제도 개혁에 대해 연립 여당 측은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전국 단일)를 혼합한 각 250석, 2표제(소선거구·비례 각 1표)의 소선거구 비례대표 양립제를 주장했다. 반면 자민당은 소선거구 300석, 비례대표(도도부현 단위) 177석, 1표제를 주장했다. 연립 여당 중 하나인 일본사회당 내에서도 현행 제도 유지를 바라는 의원들이 적지 않았고, 자민당 역시 마찬가지여서 의회는 심의를 거부했다. 소선거구 274석, 비례대표(전국 단일) 226석으로 하는 연립 여당의 양보안을 자민당이 거부했기 때문에, 여당은 10월 18일에 중의원에서 원안을 통과시켰다. 11월 24일에 참의원에서 실질적인 심의가 시작되었지만, 참의원에서는 자민당과 사회당의 세력이 커서 연내 가결은 어려웠다.[12]
1994년 1월 4일, 연립 여당은 각각 의원 총회를 열어 정치 개혁 실현 결의를 다졌다. 1월 5일부터 재개된 참의원 정치개혁특별위원회에서 자민당이 심의 거부와 회의 불참을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연립 여당 간의 결속이 굳건하자, 자민당 역시 입장을 바꾸어 법안 가결을 전제로 한 수정 논의를 시작했다. 1월 21일, 사회당 내 반란표로 참의원에서 법안이 부결되었지만, 호소카와 총리는 자민당 내 개혁파 의원들에게도 법안 가결을 호소하며 궐기 집회를 열어 다시 한번 정치 개혁 관련 법안 성립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자민당 총재 고노 요헤이도 호소카와 총리와의 정상 회담에 적극적으로 응하면서, 소선거구 300석, 비례대표(전국 11블록) 200석으로 구성된 1인 2표제(소선거구 1표, 비례 1표)와 함께 기업·단체 헌금은 1개 단체 당 500000JPY까지로 한정하는 타협안이 성립되었다. 호소카와 총리와 고노 총재는 1월 29일 오전 1시에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이 합의를 발표했으며, 이 합의를 바탕으로 개정 공직선거법, 개정 정치자금규제법, 정당보조금법 등의 정치 개혁 4법이 3월 4일에 참의원을 통과하면서 5년 넘게 지체되었던 정치 개혁이 실현되었다.[12]
결과적으로 이 정치 개혁은 호소카와 내각의 거의 유일한 실적이 되었지만, 여기서 도입된 소선거구제와 정당 보조금 제도는 이후 많은 비판과 문제점을 야기했다.
3. 2. 국민복지세 구상
호소카와 내각은 세제 개혁에도 의욕을 보였다. 미·일 포괄협의에서 미국이 내수 확대를 요구함에 따라 소득세 감세를 추진했다. 소득세 감세로 인한 세수 감소를 보전하기 위해, 호소카와 총리는 1994년 2월 3일 '국민복지세' 구상을 발표했다. 이는 3년 후 소비세를 폐지하고 복지 재원 마련을 위해 7%의 '국민복지세'를 도입하는 내용이었다.[21] 그러나 이 구상은 내각 내 충분한 논의 없이 발표되어 연립 여당 내부의 반발을 초래했다. 결국 국민복지세 구상은 철회되었고, 미·일 정상회담도 결렬되었다.3. 3. 기타 정책
1993년 12월,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시한 직전에 쌀 관세화를 6년간 유예하는 대신 수입량을 단계적으로 늘리는 방식으로 쌀 수입 부분 개방을 각의 결정하였다.[19] 당시 여론조사에서 정부 결정을 "지지한다"는 의견이 50%로, "지지하지 않는다"는 의견(38%)보다 높게 나타났다.[19]안보 및 자위대 정책과 관련하여 일본사회당과의 이견으로 내각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1993년 12월 2일, 나카니시 케이스케 방위청 장관이 "반세기 전에 만들어진 헌법을 소중히 고수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발언으로 헌법 개정 논란을 일으켜 사임하고, 후임으로 아이치 카즈오가 취임했다.
경기 침체 상황에서 경기 부양책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1994년 2월 3일, 호소카와 내각은 소비세를 폐지하고 7%의 국민복지세를 도입하는 구상을 발표했으나, 정권 내외의 반발로 철회되었다.
4. 내각의 인사
호소카와 내각은 8개 정당 및 정파가 참여한 연립 내각이었기 때문에, 각료 인사는 의석수에 따라 배분되었다.[19] 신생당의 하타 쓰토무가 부총리 겸 외무대신을, 자민당을 탈당한 신당 사키가케의 다케무라 마사요시가 내각관방장관을 맡았다. 사회당, 공명당, 민사당, 사회민주연합 대표들도 각각 내각에 참여했다.
내각 운영은 각 당 서기장·대표 간부 등으로 구성된 '여당 대표자 회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신생당 대표 간사 오자와 이치로와 공명당 서기장 이치카와 유이치의 '이치·이치 라인'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야당 등은 이를 두고 “권력의 이중 구조”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내각관방부장관에는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 특별 보좌에는 타나카 히데유키 등 모두 사키가케 출신이 임명되었다.[20]
4. 1. 국무대신 명단
일본신당 대표~ 1994년 4월 28일
신생당 당수
~ 1994년 4월 28일
~ 1994년 4월 28일
신생당 당수
~ 1994년 4월 28일
신생당
~ 1994년 4월 28일
~ 1994년 4월 28일
민사당 위원장
~ 1994년 4월 28일
신생당
~ 1994년 4월 28일
(신도쿄 국제공항 담당)
일본사회당
~ 1994년 4월 28일
공명당
~ 1994년 4월 28일
공명당
~ 1994년 4월 28일
일본사회당
~ 1994년 4월 28일
일본사회당
~ 1994년 4월 28일
신당 사키가케 대표
~ 1994년 4월 28일
공명당 위원장
~ 1994년 4월 28일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
국토청 장관
일본사회당
~ 1994년 4월 28일
신생당
~ 1993년 12월 2일[38]
신생당
~ 1994년 4월 28일
일본사회당
~ 1994년 4월 28일
사회민주연합 대표
~ 1994년 4월 28일
공명당
~ 1994년 4월 28일
(정치 개혁 담당)
일본사회당 위원장
~ 1994년 4월 28일